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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감독 김기동 목사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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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이전
극한 환경과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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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 목사는 1938년(戊寅年) 6월 25일 충남 서산군의 작은 농촌에서 아버지 김정한(金鼎漢)과 어머니 정영이(鄭英伊) 사이에 다섯째로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는 논산 채운에서 만석군을 지낸 바 있었으나 삽시간에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화병으로 별세하고, 그의 부친은 빈손으로 고향을 떠나 서산에서 김기동 목사를 낳았다. 때문에 그는 극한 가난 중에 태어나 나무뿌리, 풀뿌리 등을 캐어 양식 삼아 먹으며 자랐다. 만 14세가 되던 해 그는 고향을 떠나 예산에서 고학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8년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였다. 얼마나 지독하게 생활했던지 17세가 되던 해에는 영양실조에 걸려 기억을 상실할 정도가 되었다. 황달로 얼굴이 누렇게 떴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인분으로 기른 무를 자주 먹다가 채독(菜毒)에 걸려 합병증으로 의식까지 잃었다. 물론 제대로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으므로 죽음은 시시각각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보고 계셨다.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인진 쑥을 달여먹으라는 권함을 듣고 쓰디쓴 인진 쑥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개월, 놀랍게도 병은 완치되었다.
교회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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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전히 막막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객지에 공부하러 나간 형 대신 어린 김기동은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난은 극복되지 않았고 미래는 존재조차 않는 것 같았다. 죽을 고비를 한번 넘기고도 다시 죽을 결심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 종소리를 듣고 마음이 약해진 그는, 1957년 10월 20일(주일)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다. 기왕 죽을 바에야 하나님이 계신가 알아보고 싶었고, 늘 궁금했던 자신의 실존에 대한 문제도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들은 설교는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제목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설교에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한 채 예배가 끝났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것은, 예배 후 죽음의 결심이 사라지면서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기도와 성경읽기에 힘쓰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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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김기동은 입교한 다음날부터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새벽기도 후에는 교회 마당을 쓸었다. 얼마 후 이웃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를 해 참석하게 되었다. 강사는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고 이를 계기로 김기동은 예수 보혈의 공로와 감격을 경험한다. 동시에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터졌고 연달아 9시간을 기도하며 환상을 보기도 했다. 저녁시간이 되어 강사는 설교 전에 청년 김기동을 가리키며, "저 청년이 하던 말이 방언이오. 성령을 받으면 저 청년같이 방언을 말합니다"라고 하며 성경을 찾아 관련 구절을 소개했다. 순간 김기동은 자신이 경험한 일이 성경에 그대로 나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집회가 끝나자마자 어느 장로에게 성경을 한 주간만 빌려달라고 했다. 그 장로는 쾌히 승낙하며 은혜 받은 사람이니까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며 "이왕에 성경을 보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순서대로 꼭 읽어라"하고 지도해 주었다. 이렇게 그의 성경 읽기가 시작되었다. 빌려온 성경이기 때문에 한 주간에 성경 전체를 읽었고, 다음 주에는 다른 사람의 성경을 빌려 똑같이 읽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교회 나온 이후 1년 동안 42독을 하였다. 그렇게 그는 평신도 시절 동안 성경을 75독하였다.
처음 병을 고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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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봄, 청년 김기동은 보령"성주산"에서 열린 산상집회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왔다. 마침 어느 부인이 그를 찾아와 두 살박이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부인은 기도 중에 김기동을 찾으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부인의 말을 의심치 않았으나 어떻게 해야 병을 고칠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주님께서 소경을 만져 고치시던 일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는 말씀만 생각날 뿐이었다. 부인을 따라가니 창백한 얼굴에 핏기 하니 없는 아이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속으로 기도했다. ‘주여, 나를 병 고치는 종으로 쓰시겠다고 이 부인에게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게도 그 사실을 알려 주옵소서. 나는 한 번도 병을 고쳐본 적이 없습니다'순간 김기동은 자신이 흰 가운을 입고 주님 앞에 서 있는 환상을 보았다. 이에 힘을 얻어 아기의 옆구리에 손을 대고 간절한 마음으로'주여, 이 아기에게 주님의 이적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내 기도에 응답해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몇 차례 반복하여 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마치자 아기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생기를 되찾았다. 3개월간 병원 신세를 지며 고통받던 아이가 하루만에 건강을 되찾은 것이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병을 고친 일이다. 그 몇 달 후에는 장티푸스로 한 가족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한 사람씩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 다섯 사람이 모두 나음을 입었다.
거두어 가신 양계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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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청년 김기동은 예산농고에서 배운 축산기술로 양계장 사업을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양계장 건축에 필요한 자재, 병아리 등 많은 부분을 주변 사람들에게 지원받게 돼 순탄히 시작되긴 했지만 워낙 빚을 지고 시작했던 일이라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런데 그 무렵 그가 다니는 예산감리교회는 성전건축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2차례의 건축헌금을 했지만 진척이 없었고 이로 인해 지친 교인들은 시험에 들어 700명에서 17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김기동은 건축헌금을 결심하고 세 차례의 헌금을 한 뒤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거기다가 부친의 추도식 문제를 놓고 제사를 고집하는 형과 다툼 끝에 “하나님이 양계사업을 거두어 가실 것"이라고 말해 버렸다. 마치 욥기가 재연되는 듯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순식간에 양계장의 닭과 새끼돼지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절망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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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은 양계업이 망한 후부터 2년 반 동안 하늘이 닫혀버린 듯한 경험을 한다. 기도도 상달되지 않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다시금 죽기를 원했으나 죽음은 그를 피해갔고, 일하기를 원했으나 일자리도 그를 피해갔다. 한편 그는 양계사업이 파산하기 직전에 강순과 약혼을 하였다. 김기동의 형편이 무척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약혼녀 강순은 사랑으로 격려하며 그를 기다렸다. 죽음을 찾아다니던 그 어느날 약혼녀로부터 혼인날짜를 통고 받았다. 그의 처지를 알고 있던 약혼녀가 어떻게 해서든지 안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25세가 되던 1962년 3월 31일, 그는 모교인 예산감리교회에서 장석영 박사의 주례로 강순(姜蕣)과 결혼하였다. 김기동은 결혼식 다음날 보다 분명한 인생의 진로를 응답 받기 위해 40일 기도를 작정하고 평택으로 떠났다.
성역이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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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5월, 김기동은 결혼 후 40일간의 기도를 끝내고 아내가 일하고 있던 예산 광시로 돌아왔다. 아내는 광시에서 오빠의 치과 일을 도우면서 광시침례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며칠후 교회에서 야유예배를 갔다. 일행을 뒤따르던 김기동이 살목산의 시목리를 벗어날 무렵, 하늘에서 눈부신 빛줄기가 나타났다. 빛은 점점 그에게로 다가왔고, 15초 가량 계속되었다. 순간 그의 온 몸에 쌓였던 번민과 좌절, 시련 등이 일순간에 풀어졌다. 동시에 그동안 읽었던 성경 말씀이 시계 속을 들여다보듯 훤히 깨달아져 성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졌다. 그러면서 떠오른 명백한 성경 구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 8:31),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김기동은 성경을 75독이나 했지만 그 말씀을 하나님처럼 우러러보기만 했을 뿐 자신이 그 말씀 안에 거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예배 장소로 단숨에 달려가 자원하여 특별찬송을 부르고 그 날 길에서 본, 하늘에 나타난 그 이상을 간증하였다.
내 병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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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빛 체험"을 한 그 날 저녁, 광시침례교회 담임전도사의 권유로 폐결핵 환자의 집을 방문했다. 김기동이 방에 들어가는 순간 누워만 있던 환자가 벌떡 일어나면서"내 병이 떠났다!"고 외치면서 완치되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병든 자들의 집에서 초청이 잇따랐다. 전도사를 따라 방문한 집집마다 계속하여 큰 이적이 나타났다. 어떤 병에 걸렸든지 그 자리에서 즉시 일어나 앉았고, 병이 나은 것을 간증하였다. 15세 가량 된 소년이 급성 맹장염으로 위독하여 부모가 업고 와서 김기동이 아픈 상처에 손을 댔더니 그 순간 소년이 벌떡 일어나 뛰어 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병 고침을 받은 이들이 계속 몰려오면서 광시침례교회는 삽시간에 부흥이 일어났다. 초대 교회처럼 청년들과 어린아이들이 환상을 보고 방언을 말하였다.
나귀야, 나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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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6월 중순 한 여자 전도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한 김기동은 집회 마지막 날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자들에게 안수기도를 해 달라는 여전도사의 부탁을 받았다. 이를 위해 밤새워 기도한 후 안수기도를 해 주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많은 물고기를 잡는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날 길을 걸어가다 "나귀야, 나귀야!" 하고 부르는 신기한 음성을 들었다. 그는 이 때부터 겸손한 나귀가 되어"주님을 태운 나귀,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오직 주님만을 등에 태운 나귀가 되리라!" 하고 작정하였다. 그리고 개울가에 가서 밤톨만한 자갈을 주워 입에 물었다. 그 때부터 7개월 동안 항상 돌을 물고 다녔다. 평생에 나귀처럼 입에 자갈을 물고 남의 말을 하지 않고 오직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 때가 만 24세로 결혼한 그 해였고, 산에서 빛을 본 지 한 달 후의 일이었다. 그후 김기동이 기도해준 병자마다 모두 나음을 입었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이적도 나타났다.
귀신이 쫓겨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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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윤모섭이라는 여인이 오랫동안 심장병을 앓다가 죽었다. 김기동은 조문을 갔다가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에 대한 주의 말씀이 떠올라 말씀으로 귀신을 내어쫓자 죽었던 여인이 살아났다. 이 여인은 90년 3월 22일 성락교회를 찾아와 베뢰아아카데미 제20기 강의 때 간증을 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광시침례교회에서 열심을 내던 노재숙 집사가 죽었다. 김기동은 윤모섭 여인을 살렸던 것처럼 노집사를 다시 살려냈다.
비봉교회로 부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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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3월 충남 청양군 비봉면 비봉감리교회 교인 5명이 김기동을 찾아와 부흥집회를 요청했다. 그후 예산지방 감리사였던 이강산 목사의 추천으로 김기동은 비봉교회의 서리 전도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곳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고 부임 다음 날인 3월 18일에는 아들 성현이 태어났고 그곳에서 100일 헌아식도 가졌다. 교회는 급속하게 부흥되었고, 이적은 매일매일 일어났다. 시무 3개월쯤에는 예산 대술면 청방산에서 산상집회를 하게 되었다. 15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군용 천막을 빌어 집회를 열었다. 그 해는 어느 여름보다도 비가 많이 내려 비가 그치는 것을 위해 며칠을 기도했으나 집회 당일 아침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모두 산상집회를 연기하자고 했지만 그는 강행하기로 하고 입산을 서둘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비가 멎었고 그가 집회 장소에 다다랐을 때는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집회는 일주일간 맑은 날씨 속에 계속되었는데, 그 기간 중에도 산 아랫마을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집회 중에는 문둥병으로 고생하던 처녀가 깨끗해졌고, 설교 도중에 병이 나은 자도 허다했으며, 며느리에게 업혀 온 어떤 할머니는 이불을 쓰고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춤을 추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송충이에게 쏘인 부인의 몸이 기도하는 순간 깨끗해졌고, 집회 이틀 째 되던 날에는 문둥병자 둘이 고침을 받았다. 그 날 이후에는 손수건이 머리에 스치기만 해도 수백 명씩 병이 나았다. 주일설교 때에는 2년간 정신병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한 처녀가 강대상 위에 있던 그의 손수건을 집어다가 머리에 얹어 놓자 병이 없어졌다. 12월에는 춘천에서 온 자궁암 걸린 여인이 고침을 받았다.
40일간의 금식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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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감리교회는 그가 부임하였을 때는 십여 명이 출석하고 있었으나 4개월 후인 1963년 7월에는 180명이 정기적으로 출석하였다. 이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인도를 받기 위해 기도할 필요를 느끼고 아내에게 강단을 맡기고 경북 김천에 있는 용문산 기도원으로 40일간의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그가 금식하는 동안 교회에서는 전 교인이 매일 밤마다 철야기도를 하였다. 금식을 마친 후 주일예배에서는 태어나서 한 번도 서 본 일이 없는 일곱 살 난 어린아이가 서서 걷게 되었고,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중풍병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등 신유의 이적은 계속되었다.
비봉교회를 사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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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 전도사는 1957년 12월 25일에 오경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나 침례가 예수님의 명령임을 깨닫고 순종해야 한다고 확신하였기에 오관석 목사로부터 61년 4월 24일 광시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1963년 9월 당시 침례교 소속 함열침례교회의 담임 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집회를 열었다. 그 부흥회에서 침례교 전도사는 본교인 120여 명에게 물에 잠기는 침례를 주었다. 이로 인해 김기동 전도사는 감리교의 세례교리를 어겼다는 책임과 비난 때문에 감리교 법정에 여덟 번이나 소환되었다. 결국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교회를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신유복음전도회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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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감리교회에서의 침례문제로 김기동 전도사는 1964년 3월 떠밀리다시피 하여 서울에 올라왔다. 이후 대한신학교 입학과 함께 개척교회에서 명예전도사로 일하였다. 그러나 전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1개월 후 교회를 사임하고"신유복음전도회"를 조직하여 전국 순회 천막전도집회를 본격적으로 인도하였다. 천막전도집회 첫날 7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95% 가량이 병자들이었다. 중환자도 있고, 흔히 있는 병자들도 많았는데 설교 후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 병 나은 사람들의 간증이 한 시간 가량 줄을 이었다. 이처럼 열정적인 그의 부흥사역은 외국 선교사들에게 알려져 ‘신앙다이제스트’(Faith Digest, 1965년)에 기사화 되기도 하였다. 그의 천막전도집회 기간을 총결산하면 7만 2천여 명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으며, 약 30만여 명이 안수로 병을 고침 받았다. 일어난 앉은뱅이만도 59명에 이른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문둥병자, 중풍병자, 암환자 등이 김기동 목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신유와 이적으로 고침을 받았다
교회 개혁에 앞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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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 목사는 부흥사로 전국적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교회의 개혁에 기여하였다. 1960년대에 그가 평신도 부흥사로 전국에 걸쳐 천막를 인도할 때부터 그는 거침없이 개혁에 앞장섰다. 이 중에 몇 가지를 예로 들 수 있다. 첫째, 강단 뒷벽에 설치된 검은 커튼을 제거한 일 둘째, 예배당 안에 들어와 남녀가 혼성으로 앉게 한 일(가족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셋째, 종탑 없는 빌딩 예배당을 세운 일 넷째, 큰 강대상을 없애고 오직 보면대 하나만 둔 일 다섯째,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평신도운동을 전개한 일 여섯째, 무언 사회를 보는 일 일곱째, 매미채 같은 헌금대를 없애고 바구니를 돌리게 한 일 이처럼 그는 적극적으로 교회의 행습과 관련하여 개혁을 촉구하였다. 성경의 진리와 복음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수적이지만, 형식과 관련해서는 개혁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신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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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은 1964년 봄 당시 장로교의 지도자격인 목사 중 한 사람인 김치선 박사의 추천으로 그가 설립한 대한신학교에 입학했다. 또 66년 3월 서울 문리사범대학(현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주간에는 일반대학에서, 야간에는 대한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하다보니 신학교를 8년만에 졸업하였다.
서대문 성락교회 개척 침례 교단 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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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3월 28일 서대문구 평동 가정집에서 교인 5명과 함께 서울성락교회의 전신인 서대문의 성락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1968년 8월, 교인대표들과 함께 침례교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하고 한국침례회연맹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일주일 후 가입 수락을 통보받아 교회의 명칭을 한국침례회연맹 성락교회라 칭했다. 그 때 오관석(吳寬錫) 목사(현 서울중앙침례교회 담임) 및 장로 1명이 모교회 대표로 성락교회를 내방하여 지교회 독립예배를 드렸고 현판식도 가졌다. 그리고 1969년 11월, 지금의 신길동에 다시 개척한 것이 오늘의 성락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