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서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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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김기동 감독의 많은 작품 중에 수필작품 몇 가지만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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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필모음1
    • 수필 - 붕어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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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며칠 전에 허교수와 함께 동대문 시장에 볼 일이 있어 갔다가 청계천6가에 즐비한 헌 책방가를 지나면서 옛날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책을 살 돈이 넉넉질 않아 헌 책방을 이잡듯이 뒤지면서 책을 찾아야 했다.

      원하는 것을 찾으면 책방 주인과 싸우다시피 매달려 값을 깎고 돈이 모자라면 계약금만 주고는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고 기다려 달라 하고 겨우 돈을 준비하여 며칠 후에 와 보면 어느 집이 어느 집인지 비슷비슷하여 실수하기 일쑤요 진땀을 빼고서야 한참만에 찾았던 옛추억들이 떠올랐다. 허교수도 책방을 돌며 책을 구하던 때의 일을 기억하고 옛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웃고 걸었다.
      그러다가 붕어빵을 굽는 리어커 앞에 와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붕어빵을 보니 옛 고향 친구들을 만난듯이 반가워짐을 느꼈다.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느라 골목길에서나 볼 수 있는 옛 풍경을 가까이에서는 접하지 못하였다가 걸으면서 그것을 보니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게 얼마요?" 하니 천원에 네 개라 했다.

      그러자 허교수가 "그럼 이천 원어치만 주시오"하고 돈을 꺼냈다. 그래서 담아 주는 대로 나는 봉지를 들고 다시 걸었다. 그러자 허교수가 "내가 들지요" 하길래 그만 두라고 손을 빼듯 피하고는 그 봉지를 들고 주차장까지 걸었다. "총장님, 옛날 생각이 나시는 모양이지요"하고 말하는 허교수를 쳐다 보니 나보다 한 이십은 젊은데 그에게도 그런 추억이 있겠지만 내게는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붕어빵 생각이 종종 나지만 누가 사주는 사람도 없고 또 내가 일부러 나와서 살 수도 없으니 참으로 오랫만에 붕어빵을 먹어보게 됐다고 했다.
      내가 시무하는 교회의 신도가 수만명이요 또 대학원 대학교의 총장으로서 제자들이 여기저기 깔려있는데 총장이 길에 서서 겨우 풀빵이나 사먹고 있는 줄을 혹이라도 보면 창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 자유함이 있는 작자에게 매우 유익하고 소중하리라 본다.
      나는 고학할 때 풀빵 신세를 진 적이 많다. 보름 동안을 하루에 풀빵 하나나 풀빵 두개씩만을 먹고 견딜 때도 있었다. 창자가 등에 붙어버린 것처럼 배는 힘이 없고 쪼르륵 소리로 곁에 있는 자들의 고개를 돌리게 하곤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풀빵 하나가 들어가면 그렇게 기분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나서는 물을 많이 마셨다. 그것이 하루 창자를 달래주는 방법이었다.

      하도 가난한 때 배를 달래 준 탓이어서 그런지 풀빵이 입에 맞고 늘 먹고 싶었다. 5.16 군사혁명이 나고 나는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취직을 할 수 있는 자격도 없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평편 족이어서 신체 검사에서 1을종 판정을 받고도 영장이 나와 논산 훈련소 신검대까지 갔었지만 거기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 귀향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불합격 귀향 조치를 당한 사람이어서 군 미필자는 노동판에서도 거부할 때인지라 어디서 밥 한끼 얻어 먹기가 힘든 처지였다. 이렇게 일년간을 견디었으나 더 이상 버틸 힘도 없고 좌절감과 무력감 뿐이었다. 그러면서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죽음이었다. 이렇게 무력해진 사람을 누가 반겨줄 리도 없고 내가 일하고자 해도 일자리를 내주는 자가 없으니 세상을 하직하는 것만이 상책인 것같이 여겨졌다.
      그러므로 준비해 두었던 키니네가 담긴 봉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고향으로 향했다. 내가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불효 자식이 아버지께 사죄하고 그 곁에서 죽어 잠들어 버려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주머니 속에는 돈이 한 푼도 없고 하루를 온전히 굶은 상태였으니 기운도 없었다. 역무원의 눈을 피해 간신히 천안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무임 승차했다.
      검표하는 차장에게 걸릴까 봐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여 가면서 홍성역에 간신히 내렸다. 홍성역에서도 역무원의 눈을 피해 빠져 나가려고 고심을 하다가 겨우 빠져 나왔다. 거기서부터는 힘을 다해 십리만 걸으면 아버지 산소가 있었다.

      멀리 월산이 바라보이는데 겨울이라서 먹은 것도 없는 뱃속이 창자를 긁어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역을 뒤로하고 걷다가 다시 역쪽으로 돌아와 홍성역 공중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어찌나 지저분한지 금방 죽을 결심을 한 나라도 숨을 쉬기조차 거북할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배의 통증은 가라앉고 편안했다. 지저분한 화장실 안의 벽에는 별별 낙서가 다 그려져있는데 그 중에 눈에 띄는 낙서가 있었다. "임마 죽긴 왜 죽어". 누군가 거기 앉아 일을 보면서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고 자신을 격려했던 낙서 같았다.
      그 낙서는 나와 상관이 없는 글이라고 고개가 내려가는 대로 시선이 따라가다 말고 한 곳에 멈추었다. 색깔이 불그스럼한 종이 하나가 구겨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지폐 같았다. 흥미로워 그것을 펴보니 급한 사람이 준비하지 않고 들어왔다가 급한 나머지 휴지 대신 사용하고 버린 십원짜리 지폐였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돈인지라 거기서 나올 때에 그것을 움켜쥐고 나왔다.
      그리고 역 앞에 설치된 수도에 가서 물로 그것을 깨끗이 빨았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월산을 바라보며 다시 걸었다.손바닥에는 물이 젖은 십원짜리 지폐가 손바닥에서 나온 체온 때문에 물기가 말라가고 있었다. 몇백 미터쯤 걸었을 때에 마침 풀빵을 굽는 이가 있었다.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가서 그 돈을 주고 빵 세개를 샀다.

      두 개는 그 자리에서 먹고 하나는 종이에 싸서 주머니에 넣고 오다가 월산 푸쟁이에 올라와 거기 앉아서 마저 먹었다.
      그토록 기운을 차릴 수가 없더니만 풀빵 세 개가 들어가고 나니 힘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 낙서가 생각이 났다. "임마 죽긴 왜 죽어". 그래서 나는 혼자 웃었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는 몇년 전에 아버지만이 마을 산소에 남겨둔체 어머니와 두 동생을 데리고 낯선 예산으로 이사가다가 잔디 위에 앉아 온 식구가 한바탕 울던 자리다. 그때에 어머니는 흘러나오는 콧물을 손으로 훔쳐내듯이 푸시고는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메치시면서 우시던 그 자리다. 그때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산 목숨이 못 살아 가겠어유. 이제 그만 내려가유"하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내가 지금은 패배자가 되어 죽으려고 오는 길이 아닌가? 나는 순간에 모든 생각을 고쳐먹고 붕어빵이 들어간 뱃심으로 살푸쟁이를 뛰어 내려온 일이 있다.

    • 수필 - 보릿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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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고마비의 가을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먼 산들에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점차 가을이 붉게 타내려 오고 있다. 들녘에는 고개 숙인 벼이삭들로 황금 물결이 치는데, 옛날 같으면 낫을 든 추수꾼들의 손이 바빳을 것을 지금은 벼를 베면서 탈곡까지 하는 현대화된 농기계가 들을 누빈다. 올해도 전에 없는 대풍작이라니 고마운 소식이다.
      내가 어릴 적엔 보릿고개란 게 있었다. 보름만 더 기다리면 여문 보리를 먹을 수 있으련만 그것마저 기다릴 여유가 없어 겨우 물이 밴 보리 이삭을 잘라다가 솥에 찌고 다시 말려서 가루로 만들어 겨우 죽을 쑤어 먹었다. 그때의 그 허기짐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6·25 사변으로 전 국토는 전쟁의 몸살을 앓는데 젊은 장정들은 속속 입영되어 전쟁터로 나갔고 고령인 장정들은 전쟁터의 노무자로 차출되어 나갔으므로 농번기가 닥쳐도 일손이 모자란 농촌은 참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계절은 아랑곳없이 봄을 몰고 오니 우리 마을에도 유난히 많은 진달래가 피기 시작했다. 이때를 춘궁기라 했듯이 가난한 집에서는 아예 양식이 떨어져 굶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없는 사람들은 있는 집에 가서 양식을 구하고 꾸어 온 양식을 농사 때에 품으로 갚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양식을 곱장리로 얻어 오곤 했다.
      곱장리란 한 가마를 꾸어 오면 가을에 가서는 그것을 곱으로 갚아야 하는 악덕이다. 부익부 빈익빈이란 말처럼 있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없는 사람들은 점점 힘들어 가는 희망도 없는 삶이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있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고맙게 여기며 가난을 숙명처럼 살아가는 슬픈 일들이었다. 그러나 곱장리마저 없어서는 안 될 필요악이 되어 버린 굴절된 농촌 경제가 전쟁 후유증마저 겹쳐 더욱 참혹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하마터면 남의 집에 양자로 갈 뻔했던 일로 그 충격에서 벗어나려고 먼 데 계신 형님을 찾아갔다. 형님께는 아버지의 근황도 알려 드릴 겸 내 진학 문제를 상의 드리려 했다. 그러나 막상 형님 앞에서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가 않아 며칠 동안 우두커니 있다가 그냥 돌아왔다. 오면서 곰곰이 생각한 끝에 떠오른 묘안은 어떻게 해서든지 쌀 서말만 준비해서 그것을 가지고 멀리 객지로 떠나 고학을 해 볼 계획이었다. 내가 굳이 쌀 서말을 필요로 한 것은 당장에 입학할 수 있는 입학금이 그만큼 되었기 때문이요, 멀리 떠나려 한 것은 아버지의 사정을 전혀 무시해야만 학교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쌀 서 말을 어떻게 준비하느냐 하는 문제는 별수 없이 곱장리로 얻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쌀 서 말이 큰 빚이 되어 눈덩이처럼 불어날 때는 어떻게 감당할 것이나에 대해서는 별 묘안도 없었다. 옛 속담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란 말이 있듯이 우선 저질러 보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앞에 앉았다. 비록 병환으로 거동은 불편하시지만 아버지만 허락하시면 도리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때에 아버지께서 먼저 입을 여셨다. 내가 없는 며칠 사이에 겉보리 한 가마니를 곱장리로 얻어 왔다는 말씀이었다. 겉보리 한 가마니라야 그것을 방아로 찧으면 보리쌀 다섯 말밖에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을 가을에 가서는 쌀로 한 가마니를 갚아야 하고 가을에도 갚지 못하면 그 이듬해에 또다시 곱으로 합산해서 갚아야만 한다
      내가 쌀 서 말에 대해서 계획을 짜고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 무섭지가 않더니 이미 일이 저질러진 결과에 대해서는 앞이 보이자가 않았다.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잠깐동안 혼미해짐을 느꼈다. 내 모든 희망이 깨지고 박살이 나 버린 절망감이 감돌았다. 그때에 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그 역시 벌써부터 채무에 위협을 느끼시듯 어두운 안색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방을 나와 뒷산으로 올라갔다. 큰 나무들이 별로 없는 소나무들 사이로 올라가니 진달래가 만발하였다. 춘궁기를 맞이한 농촌 아이들에게 진달래꽃은 좋은 군것질 감이었다. 나는 그것을 한 웅큼 따서 입에 넣었다. 아무 맛도 없고 오직 뜹뜰한데 그것도 보통 군것질할 때의 맛이 아니었다. 진달래꽃을 꺾다가 용천백에게 잡혀간다란 속설이 있었듯이 차라리 용천백이라도 나와서 나를 잡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연 듯 났다. 나는 거기에 있는 옛 무덤의 잔디 위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팔 베개를 하고 눈을 감았다.

      몇 해 전에 윗마을에서 장마에 굴러 내려온 큰 바위가 돼지우리를 덮쳐 마침 새끼를 난 어미돼지가 새끼들과 함께 즉사했다는 말을 들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우리 집에 들여온 겉보리 한 가마니가 돼지우리를 덮친 그 바위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중압감에 내 몸이 뒤틀려지는 것 같음을 인해 몸을 돌려 엎드려 이마에 팔을 받쳤다. 그러자 이제는 외삼촌댁의, 태엽이 감기지 않아 고장난 채 시계 바늘이 항시 제자리에 머물러 있던 벽시계가 떠올랐다. 그러자 내 입장이 마치 정지된 시계처럼 느껴졌다. 나는 답답하여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해는 서산 너머로 이미 기울었고 월산 봉우리에만 조금 남아 있던 빛마저 해가 거두어 가고 만다. 그러자 큰 산에 가려진 마을은 서서히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그렇게도 아름답던 황혼의 노을은 서산 너머 어딘가를 심술로 불질러 태우고 있는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그때 나는 모든 것 체념하고 일어나 옷을 털었다. 그리고 겨우 길만 보이는 어두움이 깔린 산골짜기를 따라 내려와 건너편 조씨 노인 댁을 찾았다.
      조씨 노인은 아들이 둘이 있었으나 큰아들은 딸 하나를 낳고 죽었고 작은아들은 군에 입대하여 복무 중이었다. 그리고 막내딸과 여자만 다섯에 모두 여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농토가 많지 않으니 큰 머슴을 두고 일한 형편이 못 되어 69세 된 노인이 혼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그 댁에서 겉보리 한 가마니를 곱장리로 얻어 오신 것이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이댁에 와서 머슴을 살고 그 빚을 갚겠노라고 했다. 그 말에 노인은 놀라는 표정을 하더니 곧 환하게 웃는다. 아버지께서도 후에 이 사실을 아시고 충격을 받으셨지만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오히려 고마워하시는 눈치였다.
      그해 여름은 무척 가물었다. 그리하여 연 2년째 흉년에 접어들었다. 나는 나무하는 일과 풀 베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자기 산이 있는 사람은 나무할 곳이 있어도 자기의 산이 없는 사람은 별수 없이 먼 산으로 나무를 다녀야 했다. 조씨 댁도 자기 산이 없으니 마찬가지였다. 매일같이 오후에는 소먹이 풀을 베야 하나 극심한 가뭄은 논두렁마저 먼지가 날 정도로 풀을 말렸다. 그러므로 풀베기는 더욱 고민스러웠다. 혹 남의 논두렁에 가서 풀을 베다가 들키는 날에는 큰 봉변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간신히 찾은 짧은 풀을 잡고 낫질을 하다가 묵은 콩대나 돌이 튀어나오면 영락없이 손을 베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거의 매일같이 손가락을 다쳤고 손에는 항상 헝겊을 감고 다녔다. 혹 산에 가서 다치면 소나무 껍질을 얇게 벗겨 그것으로 상처 난 부위를 덮고 칡넝쿨로 감았다. 이 때문에 자면서도 앓는 소리를 하더란 말을 노인이 해 주었다.

      현숙이라는 그의 열일곱 살 난 딸은 참으로 마음이 고왔다. 열네 살인 나는 그녀를 누나라 불렀다. 그녀는 나를 친동생처럼 사랑해 주었다. 어느 날은 읍내까지 가서 약을 사다가 내 상처 난 손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치료하면서 내가 아파할 때는 그녀의 손도 떨었다. 여름밤엔 마당가에 있는 대추나무 아래에 밀대 방석을 깔고 거기 앉아 오래도록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새 벼이삭이 피고 추석을 한 달 앞둔 때였다. 칠월의 보름달은 무척이나 밝아 달빛을 받는 벼이삭들도 은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 날도 모기를 쫓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함께 앉았다. 그녀가 바가지에 담아 온 찐 감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할 때, 내 손에 가만히 쥐어 주는 것이 있었다. 무엇을 몇 번 접은 것이어서 궁금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방에 가서 보라고 했다. 나는 직감에 이것은 어떤 내용 있는 비밀한 선물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내 호흡의 리듬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달빛에 조명된 그녀의 모습을 보니 마치 어떤 인형극에서나 볼 수 있는 주인공 같았다. 쌍꺼풀진 움푹 들어간 눈매와 양 볼에 나타나는 보조개가 더욱 그랬다. 나는 갑자기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겨드랑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옴을 느꼈다.

      그날 밤 나는 등잔 불빛 아래서 그녀가 준 것을 펴 보았다. 하트모양의 인화된 그녀의 명함판 사진과 종이에는 짧은 글이 쓰여있었다. "기동이 나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해. 너는 꼭 성공할 거야." 나는 그것이 연애 편지일 거라고 스스로 해석하니 달빛 아래서 본 그녀의 현란한 모습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침상을 들여오는 그녀의 얼굴은 조금은 상기된 것 같았고 수줍어 보였다. 이때부터 나는 나무하러 산에 갈 때마다 그것을 꼭 휴대했다. 그리고 그것을 펴 보고 읽고 또 읽었다. 어느덧 가을일이 끝나고 겨울이 닥쳤다. 그녀의 사랑 때문에 힘들어도 힘든 줄을 모르게 머슴살이를 하는 동안 계절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첫눈이 내린 아침, 나는 그녀의 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하고 그의 집을 나옴으로써 8개월간의 머슴살이를 마감했다. 그간에 아버지의 병환도 많이 나아지셨으므로 어는 정도의 활동이 가능해 졌고 나는 다시 향학의 불리 붙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듬해 봄 집을 떠나 꿈에 그리던 고학의 장도에 올랐다. 내 나이 열여섯 살이 된 해에 그녀는 시집을 갔고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내가 대학에 다닐 무렵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고 박정희 장군은 굴절된 농촌 경제를 바로 잡기 위해 메스를 가했다. 이로써 가난뱅이의 목을 조르고 눈물을 짜낸 곱장리라는 사악한 괴물은 그의 칼날에 죽은 것이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던 옛날 보릿고개의 한 많은 사연들이 이제는 추억만 남겨 둔 채 세월에 씻겨 감으로써 후세대가 실감하지 못하지만 역사는 솔직히 그러했다.

      보름마다 가는 이발소에 가서 앉았을 때에 "이제는 머리 염색 좀 하시죠."라고 하는 이발사의 말에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느새 머리엔 흰 서리가 소리 없이 내려앉아 있었다
    • 수필 - 살푸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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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어릴 적에 살던 고향 마을엔 기억 나는 일도 많다. 늘 그렇게 생각했듯이 월산(月山)의 큼 치마폭에 수놓은 듯한 아기자기한 마을 풍경이 퍽 아름답다.봄이면 진달래가 온통 만발하고 가을이면 붉게 익어 가는 감나무들이 또한 장관을 이룬다. 월산 남쪽 끝자락에는 저 멀리 면 사무소가 보인다. 거기서부터 우리 마을이 시작되어 길게 산 쪽으로 뻗은 길 끝이 살푸쟁이(살푸리재)다. 우리 마을 쪽에서는 천천히 피어오르는 순한 비탈길이지만 읍내 쪽에서는 갑자기 가파라지는 산 중턱이다. 살푸쟁이는 나무가 별로 없고 민둥한데 무질서하게 잔디가 그럭저럭 자라고 있다. 장날이면 사람들의 왜래가 제법 빈번하지만 그래도 해질 무렵이면 어른 애 할 것 없이 혼자 가기를 꺼리는 곳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돈이 드는 교통 수단을 극복하고 이 길을 이용한다.
      이 길에는 한도 많고 눈물도 많고 이야기도 많다. 보릿고개로 견디기 힘들 때면 어린 딸 애 보는 식모살이로 남의 집에 데려다 주고 혼자 돌아오던 어머니가 살푸쟁이의 잔디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아 기차가 사라져 간 저 멀리 들판을 바라보면서 슬픈 소리를 내며 통곡하는 곳이요, 6.25 때 의용군에 끌려간 남편이 그리로 돌아올 것만 같아 매일 밤마다 한 발 한발 마중을 나갔다가 마침내 실신해 버린 한 많은 살푸쟁이다. 그리고 이쪽 저쪽 마을 사람들이 살풀이를 하느라 종종 시루떡을 떼어놓고 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월산 서쪽을 기대고 사는 모든 마을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경제 해결의 길이기도 하다. 장날이면 무엇이든 돈이 될 만한 농산물을 이고 지고 넘어가면서 잠깐씩 쉬었다 가기도 하고, 으레히 밤알 만한 돌멩이를 세 알씩 주워다가 돌무더기에 던지고 가는 순박한 행인들의 절차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기고 하다.
      아직 진달래가 피기 전쯤 이른 봄에 나도 장에 가는 사람들의 큼에 끼어 이 살푸쟁이를 넘었다. 그때에 계란 꾸러미를 옆에 끼고 가는 사람, 머리에 곡식 자루인 듯한 것들을 이고 가는 사람, 바지게에 닭 몇 마리 발목을 묶어 지고 가는 사람, 그리고 마른 솔잎을 긁어 모았다가 팔려고 한 짐 지고 가는 사람 등등의 행렬이 이 살푸쟁이를 통해 가파른 읍내 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며칠 전 읍내에 사시는 일가 어른이 우리 집엘 오셔서 뵌 적이 있었다. 우리 집이라고 해야 실은 남의 집이다. 이곳 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머문 남의 집 사랑채다. 집이 낡고 너무 헐어서 큰 기둥 나무로 몇 군데를 떠받치고 있는 헌집이다.

      아버지의 소개를 받고 그 어른에게 큰절을 올렸는데, 그 분은 키가 크시고 근엄하신 분이셨다. 그 분이 내 손을 잡으시더니 별 뜻이 없는 몇 마디를 물으셨다. 그러나 분명히 내게 관심은 있는 것 같았다. 그 분이 가실 때에 다음 장날에 자기 집에 꼭 오라 하시기로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 다음 '예'하고 대답을 했었다. 마침 장날이 되어 내용도 별반 없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그 댁엘 가는 길이었다.
      일가댁은 홍주성 성벽이 마주보이는 작은 마을인데 그 댁은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처음 가본 집이지만 매우 크고 깨끗했다. 내가 들어서자 온 식구가 반가이 맞아주시는데 느낌이 조금은 이상했지만 곧바로 어른들께 허리를 굽혀 몸을 돌려가며 절을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나를 덥석 안으시면서 내 배쪽에 손을 갖다 대시고는 얼마나 배를 곯았느냐고 하시며 쓰다듬으셨다. 그리고는 이제부터는 내 집에서는 배 안 곯는다 하시며 환히 웃으셨다. 그런데 이어 일가 어른께서 받아 하시는 말씀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너를 내 집에 양자로 들이기로 했다. 느이 아버지와 상의가 잘된 일이지만, 이는 당연한 인연이다. 우리 안동 김씨 선원 자손 중에 그 아우는 (아우란 우리 아버지를 칭한 말) 아들이 사형제나 있고, 나는 딸만 둘이고 자식이 없다. 그래서 종손이 대를 잇기 위하여 너를 양자 하기로 합의가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합의로는 문중 어른들의 동의를 이내 받아 놓았다란 뜻이었다.

      순간 나는 무엇으로 호되게 얻어맞은 듯이 어안이 벙벙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일가 친척간에 대를 이을 자식을 출가시켜 주는 일은 한국의 전통이요 풍습이다. 그러나 막상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이 안 나와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입고 온 솜바지는 어머니가 밤새 기워 주신 것이다. 색이 조금 다른 천으로 무릎 부분을 붙여 기운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를 만지작거리는 내 손등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평생을 무능하게 사시다 중환을 앓고 계시는 아버지의 불쌍한 모습이 크게 떠오른다. 나는 소맷자락으로 훔치면서 나오는 눈물을 막으려고 했지만 끝내는 소리내어 흐느끼고 말았다. 온 식구가 여러 말로 나를 위로하지만 내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른다. 집을 떠나 올 때 일곱 살과 네 살짜리 동생들이 따라 나오면서 "언니 어디가?"하고 묻고는 멀어져 가는 형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서서 바라보던 그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내가 산에서 캐 온 칡 뿌리를 형제가 나누어 씹으면서 형을 고마워하던 그들의 눈초리가 아른거린다. 그들이 금방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마침내 방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일가 어른은 나를 달래면서 "느이 아버지와 인연을 끊는 것이 아니고, 니가 아버지 한 분을 더 모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이랑 논밭이랑 다 니 것이 될 터인데 너무 상심치 마라."하시나 나에게는 아무 말씀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 입에서 나는 내 소리를 내가 듣는데 "아버지 나는 아버지와 살래유! 그리고 동생들과 같이 살래유! 동생들일랑 내가 키울래유! 나는 아버지 곁으로 갈래유!"를 연발했다. 그렇게 그 밤은 길고 괴로웠다.

      나는 아침에 집엘 다녀오겠노라고 어른께 양해를 구하고는 도망치듯이 그 집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어찌나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했든지 어느새 살푸쟁이에 올라와 있었다. 이전 같았으면 무서워서 소름이 끼치던 살푸쟁이가 이 날엔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멀리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산자락에 가리워 보이지 않았지만 앞 들에 독식도 갈지 않은 논밭들이 그림처럼 보였다. 나는 마치 몇 달 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나는 읍내 쪽을 한 번 뒤돌아 본 후에 새가 날으는 모양으로 두 팔을 넓게 벌리고 마을을 향해 내려달렸다. 그러나 지난 두 끼를 융숭한 대접을 받고 뱃속이 든든해 가지고 가는 것이 내 동생들에게 몹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이듬해에 아버지는 기어이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나는 열일곱 살에 어머니를 모시고 두 동생과 함께 보릿고개가 오기 전에 고향을 떠났다. 숱한 고생을 하시고 잠드신 아버지의 산소만을 그 곳에 남겨둔채 우리 가족은 살푸쟁이로 향했다. 떠나 올 때 집 근처에 있는 아버지의 산소에 가서 큰절을 올렸다. 이윽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산소에 엎드려 소리내어 실컷 우시더니, 이 사람 저 사람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붙들고 또 우셨다. 어느새 살푸쟁이까지 오는 동안 우리 모두는 눈들이 부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 곳에 와서는 더 큰 소리로 우신다.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메치듯 땅을 치시며 통곡하신다. 이 마을에서 지지리도 못살고 떠나가는 패잔병 같은 우리 가족에게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남편과 같이 넘었던 이 길을, 남편을 두고 혼자만 떠나가는 미망인의 애곡 소리에 자식들이 모두 눈물 덩어리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억지로 부축하여 읍내로 향하는 살푸쟁이의 가파른 길을 내려갔다.

      어느새 세월은 가고 세상은 급변했다. 지금은 새로운 교통수단에 길손을 빼앗겨 버린 살푸쟁이를 통행하는 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지금도 나는 가끔 살푸쟁이를 가 보고 싶어한다. 이동 통신이 발달하고 모든 문명이 첨단화된 이 때에 우거진 풀숲에 가려져 가는 살푸쟁이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 수필 - 월산(月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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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항선 열차를 타고 가다가 홍성역에 도착하여 내리면 저 멀리 월산이 보인다. 월산은 홍성군에서 가장 큰 산으로 그 자태가 마치 고향을 지키시는 인자하신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큰 치마폭을 내리고 근엄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역에서부터 한참 걸어 들어가면 옛 홍주성의 조양문이 열려있다. 이전에는 거기로 버스도 지나다니고 마차들도 지나다녔다. 이 문으로 들어서면 좁지만 옛 원님이 집무했다던 군청이 보이고 그 앞을 지나 무너진 옛 성터 사이로 뚫린 마차길을 걸어서 다시 논밭 사이로 트인 농로를 따라 월산의 치마자락을 밟는다. 그러나 월산이 내게는 얼마나 커 보였던지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고 도무지 다가서지 않는다. 콩밭과 수수밭이 어울려진 긴 황토길을 따라 가노라면 별의별 공상이 복잡하게 스쳐간다.

      이 길은 마침내 월산 마을 중간을 가로질러 갑자기 좁아진 소로가 제법 깊은 골짜기를 피하지 못하고 내려갔다가 얼마 후에 건너편 솔밭 사이로 진입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우리 동네까지는 집한 채도 없고 앞뒤를 둘러보아도 으슥한 숲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길을 어려서부터 수 없이 왕래했지만 단 한번도 편한 마음으로 걸어보지 못했다. 비단 나 뿐만 아니라 이 길을 이용하는 우리 동네 누구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이 길은 월산 마을 사람들도 가기 싫어한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어머니의 치마폭 같다던 생각은 갑자기 사라지고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인데도 등골이 오싹오싹해 오는 무서운 생각들이 짓누르는 길이다.
      6.25사변 때에 수많은 사람들을 이 골짜기에 몰고와서 대창으로 마구찔러 죽였다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그 때에 숨을 거두지 못한 이들의 살려 달라는 신음 소리를 듣고도 화가 두려워 줄행랑을 쳤다는 이에게 꿈마다 그 죽은 사람들이 나타나 괴롬을 핀다는 말도 떠돌았다. 그래서인지 골짜기를 겨우 지나 솔밭 사이로 오르려면 봉분 위에 소나무가 아무렇게나 자란 옛 무덤이 반쯤은 길 아래로 깎여내린 채 당장이라도 시체가 든 관이 튕겨나올 것만 같은 흉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 때에 대창에 찔려 죽은 시체들의 틈을 비집고 손을 내밀며 살려달라던 그 손들이 뒷덜미를 잡아 챌 것만 같은 생각이 발을 허둥거리게 한다. 그리고 내 발짝 소리에 스스로 놀라기 일쑤였다. 아직도 앞을 쳐다보면 내가 넘어야 할 가파른 살푸쟁이가 다시 위협한다.

      그 고갯길에는 나무는 많지 않지만 이쪽저쪽 마을 사람들이 살풀이를 하느라 짚불을 놓은 흔적들과 울긋불긋한 헝겊들을 걸어 놓은 앙상한 나무가 돌무덤 위에서 흔들거리면 갑자기 어디선가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무서운 예감이 발을 더욱 저리게 한다. 우리 아버지도 이 고갯길에서 크게 놀라신 다음 심히 아프시다가 열흘만에 세상을 뜨셨다. 이렇게 이 고갯길을 걷다가 놀란 사람마다 심히 앓거나 그러다가 죽는 이가 적지 아니하다 했다. 나는 이 길을 걸을 때면 소리를 지르거나, 할 줄도 모르는 유행가를 목청 돋우어 불러댔다. 이는 나뿐이 아니라 대개는 그러했다. 이렇게 무서운 살푸쟁이 길을 굳이 걸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해도 그 이유는 있다. 이길 외엔 우리 마을에서 읍내로 통하는 질러가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려면 코가 길바닥에 닿을 듯 하다. 그래도 숨가쁘게 걸어 올라가야만 하는 것이 숙명인 것처럼 뒤를 돌아다 볼 용기가 없다. 줄어들어야 할 고갯길은 줄지 않고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와 뒤꿈치를 붙잡을 것만 같은 무서움은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젖게 했다. 벌써 해는 살푸쟁이 너머로 숙였고 월산은 허리잘라 비스듬히 비쳐내리는 오후의 햇살은 그늘진 고갯길을 더욱 적막하게 했다.
      숨을 헐떡이며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에 갑자기 온몸이 후끈히 달아오르는 전율을 느끼면서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벙거지같은 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이 저만치 풀밭에 앉아서 내가 올라오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거기에 사람이 앉아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를 못했다가 그를 보는 순간 놀람과 동시에 불같은 오열이 온 몸을 휘감은 것이다. 그는 반대편에서 올라와 잠시 쉬면서 내가 금방 올라온 그 길로 내려갈 참이었다. 그도 나처럼 이 길이 무서운 길일까? 온몸은 땀에 젖었지만 뒤에 사람을 두고 내려가는 길은 아까처럼 무섭진 않았다.

      살푸쟁이 돌무덤 위에는 짚으로 허수아비를 엮어 던져 놓은 것이 있었다. 그 허수아비의 배를 가르고 거기에다 십원짜리 지폐같은 것을 끼워둔 것을 이따금씩 보기도 했다. 살풀이를 하면서 귀신에게 노자를 준 것이란다.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이야기 속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혹시 그 고갯길에서 허수아비 샛 속에 든 돈을 꺼내갔다가 그날 밤에 누가 찾기에 나가 보았더니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싸리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당신이 빼앗아간 내 노자를 내놓으라고 다그치더란다.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니 난 살푸쟁이에서 내려왔는데 내 돈을 빼앗아간 놈을 찾아왔노라고 하며 무엇으로 후려치는 바람에 깜박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달은 중천에 훤히 떠있고 달빛에 대낮같이 밝혀진 앞 마당 위에는 살푸쟁이에 누워있던 그 허수아비가 쓰러져 있더란 것이다. 이런 말이 퍼진 다음부터 살푸쟁이의 무서운 이야기는 꼬리를 물었다.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도 밤이 되면 살푸쟁이를 쳐다보기조차 쭈뼛거리는 곳이다.
      한번은 우리집 마당 끝에 있는 뒷간에 갔다가 무심코 살푸쟁이를 쳐다본 순간 그만 깊은 독에 빠져버릴 뻔했다. 달빛에 반사된 밤 구름덩이 하나가 불쑥 올라오는 것이 마치 사람이 내 눈 앞에 다가 선 것처럼 보였던 것을 자세히 보고 착각했음을 확인하고도 방으로 되돌아 올 때에 신을 제대로 벗을 수가 없었던 일이 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 어느덧 우리 마을 위쪽 할머니네 흙담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구십이 넘도록 혼자 사시는데 아들도 6.25때 죽었고 얼마 전에는 손자마저 죽었다. 팔자가 센 할머니라 하여 모두가 불쌍히 여기는 분이다. 그래도 연세에 비하여서는 정정하신데, 그는 가끔 귀신에 홀려 살푸쟁이를 한밤중에 혼자서 넘어 다니신다고 했다. "너 어데 갔다 오니?" 하고 흙담 위에 얹어놓은 낡은 영 위로 고개를 불쑥 내민 할머니의 물음에 나는 참으로 기절할 뻔했다. 다 빠지고 몇 가닥 안 남은 흰 머리카락은 양쪽으로 흘러내리고 검버섯이 잔뜩 난 핏기 마른 얼굴에 미소를 지으니 윗니는 모두 빠지고 아랫니 서너 개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 보시고 계셨다. 영락없는 귀신같았다. "아이 깜짝이야! 예산서 오는 길이예유. 할머니, 안녕히 계셔유."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얼마 안가 황씨네 집 앞 후미진 모퉁이의 대밭을 지날 무렵 무엇이 후다닥하고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수탉 한 마리가 내가 달려 내려오는 소리에 놀라 대밭에서 튀어나오면서 나와 부딪친 것이다. 그 놈도 어지간히 놀랐던지 꼬꼬댁 거리며 저물어가는 온 동네를 향해 시끄럽게 울어댄다. 나는 옷을 털면서 일어나 어두움이 물든 대밭 속을 힐끗 쳐다보았다. 거기서 무엇이 또 나와 나를 덮칠 것만 같아서였다. 황씨네는 6.25때 열여덟 살난 장자가 대창에 맞아 죽었고 그 후로는 사람들이 그 집앞을 지나다니기를 꺼려하는 집이다.
      우리 집에 당도했을 때는 월산 봉우리만 서쪽으로 기울어 버린 햇빛이 마지막으로 쏘아주고 있었다. 마치 산은 금관이라도 쓰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월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해 보였다. 일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갈치 몇 마리를 그릇에 담아 이고 팔러 나가셔서 집에 안 계셨고 어린 동생 둘만이 마루에 걸터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언니 왔다"하고 뛰어내려온다.
      사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고향을 생각하면 월산이요, 월산 하면 살푸쟁이가 떠오른다. 그곳이 나의 가난했던 고향이다.
  • 수필모음2
    • 수필 - 새벽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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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소와 같이 아내와 새벽운동을 나섰다. 어제 저녁 뉴스에 오늘 아침에 전국이 영하로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역시 새벽바람이 차다. 얼굴을 때리고 가는 바람이 핏기 마른 얼굴을 모멸하는 것같이 느껴진다. 가로수의 낙엽이 날리고 새벽을 달리는 거리의 차들이 마음을 급하게 재촉하는 것만 같다. 나도 어디론가 달려야만 할 것 같기도 하고 한없이 빨라지는 세월이 더욱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이렇게 새벽운동을 한지도 8년 세월이 흘렀다. 엊그제 같은데도 벌써 8년 세월이라니 이렇게 다시 8년이 지나면 나는 정말로 늙은이 취급을 받게 되고 그 다음엔 하루가 바람처럼 흘러갈 것이다.
      금년초에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보았었지만 한가지도 성사된 일 없이 쏜살처럼 가버린 날들이 아쉽기만 하다. 옛부터 늙은이에게 인사말이란 밤새 안녕하십니까? 하는 말이라더니 밤새 무슨 일이 생겨날 지도 모른 삭아버린 인생이 또 무엇이 아쉬워서 따져보려는 것인가, 가로수의 잎들이 몇 주 후면 모두 떨어져 버리겠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서 늙은이들의 서글픈 하소연을 이해나 해 줄 것인가. 나무의 수명만도 못한 약하디 약한 인생들이 내일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것 같다.
      나는 가끔 30년 뒤의 이 거리를 연상해 보곤 한다. 물론 나는 그때에 이 땅 위엔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마치 30년 훗날에 이 거리를 거닐어 보는 것처럼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그 때는 많이 변하겠지만 이미 수십년 전에 세상을 떠나버린 한 목사의 그림자처럼 남아있는 건물들이 무슨 의미의 대화를 나누어 줄 것인가? 힐끗 힐끗 건물을 올려다 보면서 옛날 극성부리던 목사의 흔적을 기억해 내듯이 생각 속에 잠시 머물러 줄 것인가, 아니면 지나가 버린 사람에 대한 무관심이 더 이상 의미를 생각해 내지 아니할 것인가 궁금하다.

      바람은 남쪽으로 뻗은 큰 길을 돌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삐 간다. 모양도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바람. 그러나 분명히 소리를 낼 줄도 알고 차갑게 노출된 피부를 찢듯이 꼬집고 가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다. 바람은 어디선가 시작하여 어디론가 가버리면 그만이다. 인생처럼 아쉽다거나 서럽다는 불평없이 다만 제 갈길만 바쁘다.

      할 일은 더 많아지고 해낼 능력은 점점 없어지고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 길을 걸어야 하는 늙은 일꾼의 울적해지는 마음을 달래기가 어렵다. 모친의 복중에 잉태하고 있을 때에, 나도 아직 올라가 보지 못한 저 하늘의 영광을 약속받은 대로 예수 안에서 채우려고 힘쓰고 있다. 태아가 아무 생각을 할 수 없고 출생 후에도 태중의 때를 기억할 수 없듯이 이 세상을 떠나면 역시 세상을 모두 잊어버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곳 역시 하늘이 아닐 것이다. 분명 저 하늘에서는 이 세상을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 갈 것이다.

      그리고 훗날 역사는 내가 걸어온 길을 기억해 줄 것이다. 역사에 대한 철학이 없는 자는 세상을 더럽게 산다. 사람은 두 가지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중 하나는 역사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 둘 다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한 갚음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소리 없이 가버리는 바람이 더 낫겠지만 인생은 바람이 아니다. 분명히 인격을 가졌고 역사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인생은 책임 있는 피조물이다. 땅에 남는 것은 역사의 평가요 하늘에서는 행한대로 갚으실 하나님의 심판이다.

      새벽운동 코스는 예배당 앞을 지나서 골목으로 통과한다. 이 길은 동서로 가로지르기 때문인지 바람이 그리 세지 않지만 곧 커브를 돌게 되면 다시 세찬 바람이 분다. 북편 저쪽에 아파트 군이 있으나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것 쯤을 훌쩍 넘어서 땅바닥을 쓸고가는 것이 마치 큰 구렁이가 담을 넘는 듯하다. 이전엔 이 곳이 큰 내(川)였다. 관악산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이 이 곳을 지나 한강 하류로 연결된다. 그래서 장마때만 되면 이 일대가 온통 물바다가 되곤 했었다. 몇 년 전에 이곳을 복개함으로써 평지보다 높은 지대로 변했다. 그래서 바람은 어느 곳보다도 세고 차다. 귀가 몹시 시렵다. 날이 갈수록 속도를 더할 바람은 늙어가는 목사 부부의 핏기를 말린다.

      내가 이곳에 온지도 27년이 됐다. 청년이 와서 아들을 낳고 다시 손자를 볼만한 세월이다. 쏜살처럼 지나가버린 세월이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몇번 안되는 듯 싶은 철 바뀜이 벌써 27년이라. 바람처럼 가버린 27년의 세월이 내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한 일도 많지만 할 일 또한 첩첩한데 시간이 없다. 마음만 바쁘고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때가 곧 몰아닥치면 한숨만 새어나겠지.

      새벽운동은 몸을 튼튼히 하고자 함이다. 늙어가는 몸을 막을 수 없는 숙명 앞에서 주어진 날들이나 건강하게 살고자 함이다. 비록 몸은 낡아버리고 늙으면 힘으로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해도 평생을 낡아온 늙은이의 지혜가 뒤에 오는 자손들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늙은이의 썩은 냄새로만 여겨질 잔소리가 될 것이니 그래서 천덕꾸러기 인생으로 전락해버리는 게다. 내가 내 자손에 대한 노파심과 희망을 두루두루 가짐은 그들도 후회하지 않게 함이요, 나 역시 부끄럽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우리 하나님은 아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셨다. 오늘날 인생들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자손에 대한 참사랑은 자손들로부터 영광을 받게 되는 대가가 분명히 있다. 농사하는 자가 밭에 씨를 뿌림은 가을걷이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인생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어느새 전철이 지나가는 다리 아래까지 왔다. 마침 전철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지나간다. 저만치 쳐져서 힘들어하는 아내가 안쓰럽다. 바람처럼 가버린 옛날이 추억처럼 남아서 어른거리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알아줄 자가 없다. 나는 아내를 수없이 구박했었다. 물론 미워서가 아니라 여자의 생각과 남자의 생각이 조금은 다른데서 오는 갈등과 마찰들이 당장 급한대로 윽박지르는 습관을 따라 그리한 것이다. 그런 윽박 소리 때문에 찍소리도 못내고 바람 속에 자신을 날려보낸 아내의 꼬부라진 등을 쓰다듬었다. 나도 결국은 바람이고 당신도 역시 바람이요 여름에 불던 바람일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겨울에 부는 바람 속에 묻히고 있다오. 이 인생은 이제 언제쯤 저멀리 가버린 바람처럼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인가. 바람이 쓸고 가버린 길거리엔 다시 낙엽이 내려 앉는다.
    • 수필 -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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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일생을 통해 구두닦이 소년 앞에서 구두를 신은 채로 발을 내밀고 닦아본 일이 아마 세 번쯤 될 것이다. 그렇다고 구두를 닦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신을 벗어주고 닦은 일은 몇 번 더 있지만 대개는 집에서 혼자서 닦곤 했다.
      나는 구두닦는 소년을 볼 때마다 옛 생각이 떠오른다. 내게 세 살 터울인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중한 병에 걸렸으나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약을 쓸 형편도 못되고 온 식구가 불쌍히 생각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버지는 노동력을 상실한 채 시골에 가 계시고 그 많은 식구를 정직한 말단 월급쟁이인 형님이 부양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동생은 하루종일 숨만 헐떡이며 봄 햇볕을 나와 쪼이는 일이 유일한 안식이었다.
      어느날 동생은 나를 보고는 당황하는 눈빛으로 손을 뒤로 숨긴다. 나는 호기심에 동생의 손을 비틀듯이 억지로 펴보이게 했다. 누렇게 병든 손아귀에는 새까만 빈 고동껍질이 한움큼 있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먹고 싶어 빨아먹었다고 말하고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무안하여 큰 소리로 운다. 나도 동생이 불쌍해서 동생을 껴안고 한참동안 같이 울었다. 나는 이때부터 동생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널판대기를 주워다가 구두닦이통을 짜고 형님이 구해주신 솔과 구두약을 챙겨가지고 미군부대 앞으로 갔다.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키가 큰 소년들과 청년들이 텃세를 부리고 있어서 열세살배기인 나로서는 돈을 벌 기회가 영 오질 않았다. 마침 흑인 병사가 일부러 나를 불러 자신의 구두를 닦게 해줌으로써 첫날에 돈을 번 것으로 인절미를 사가지고 동생에게만 몰래 먹게 했다. 그리고 매일 사주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 나를 동생은 매일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해가 질 때에 나는 들어왔고 그때마다 동생은 영락없이 그곳에 앉아있었다. 동생이 좋아하던 것은 인절미였지만 돈을 벌기엔 영 힘이 들었다. 그 부대 앞에서 더 이상 구두를 닦을 수가 없었다. 큰 아이들에게 발길질을 당해가며 하루에 겨우 한두 켤레 닦았다. 그러나 그마저 한 켤레도 닦지 못한 날은 떡을 사지 못했고 빈손으로 오는 오빠를 동생을 소리내어 울었다.

      어느날 동생과 약속하고 다른 꼬마 구두닦이들과 함께 비행장 부근 미군부대가 있는 곳으로 수십리를 걸었다. 그곳에서 이틀 밤을 부서진 창고 안에서 새우잠을 자가며 모두 다섯 사람의 구두를 닦았다. 거기서도 역시 큰 애들의 등살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손에 몇 푼을 쥐고 나니 어서 동생에게로 가고 싶었다.

      집은 형님이 사는 철도관사였다. 큰 길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약간의 언덕이 있고 그 언덕으로 올라가면 정면으로 동생이 기다리는 현관이 보였다. 나는 삼일동안 못본 동생을 보고싶은 마음에 가슴이 설레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동생이 좋아하는 인절미와 미군이 준 초코렛을 통 속에 숨겨 넣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머리로부터 조금씩 보이던 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해는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머리에 스쳐가는 예감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뛰어들어가 동생을 불렀다. 형수님이 나오시며 하시는 말씀이 내가 나가던 날 죽었다고 말해주신다. 나는 그만 땅바닥에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고 울었다.

      불쌍한 내 동생!

      언젠가 나는 동생이 너무나 주접을 떤다고 큰 소리로 핍박을 했었다. 그러자 "오빠 나 배고파"하고는 엉엉 울던 생각이 떠올라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아래 남동생을 데리고 동생이 묻혔다는 공동묘지를 향했다. 일곱 살 배기 동생은 나를 이리저리 공동묘지 임자없는 수많은 봉분들 사이로 끌고 다니며 제 누이가 며칠 전에 묻힌 곳을 찾아 해매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여러 구의 시체를 가져다 묻는 바람에 동생은 끝내 찾질 못하고 말았다. 나는 동생의 뺨을 한 대 후려쳤다. "이 자식아! 그걸 못 찾아 임마! 누나가 묻히는 데도 잘 봐두지 않았어"하고는 둘이서 껴안고 또 울어댔다
      해는 벌써 서산을 넘고 있는데 그렇게 무섭기만한 공동묘지는 그날따라 무섭지가 않았다. 내 동생이 묻혀 잠들어 있는 이곳이 오히려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어깨에 여전히 메고 있는 구두통 속에 있던 죽은 동생에게 주려던 초코렛을 남동생에게 주고는 그곳을 빠져 나왔다. 둘이서 철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철로변 웅덩이가 있는 곳에 이르러 둑에 앉아 또 울었다. 웅덩이에는 지저분한 전쟁쓰레기들이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다. "불쌍한 내 동생 옥자야"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구두통을 힘껏 던져 버렸다. 이로써 내 인생에 이개월 간의 구두닦이의 이력을 끝낸 것이다.

      수십 년이 흘러간 오늘에도 구두닦이 소년을 볼 때마다 그때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간다. 그리고 나를 그들 틈에 정지시킨다. 그들은 마치 고향 친구처럼 정감이 간다.
      지금 나는 주님 앞에 엎드려 옥합을 깬 여인처럼 주님의 발을 씻어 드리는 구두닦이가 되고 싶어한다. 내 머리털로 문지르고 눈물로 적시면서 내 평생을 그렇게 해드리고 싶다. 하지만 나는 위선자답게 옛 일을 잊으려할 때도 종종 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치고 꾸짖으며 나를 부끄럽게 하려고 애쓰게 된다. 내가 구두닦이 출신이면 어떻고 급사 출신이면 어떤가. 그런 것들이 나의 이력이요, 나의 고향이다. 나는 참으로 과거를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으나 그것이 나의 진실이 아니겠는가!
      내게 신앙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그래서 성경 말씀이 떠오른다. "오늘날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주님이시로다" 이제는 육십을 며칠 앞두고 있으니 지나간 일들이 잊혀지기도 하련만 영 그렇지가 않다. 지금도 서쪽으로 해가 기울면 오빠를 기다리던 동생의 불쌍했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이 늘상 그립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은 고향을 찾는다
    • 수필 -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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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사랑이란 단어는 내게는 도리어 부도덕하게만 여겨질 일이지만 숨길 수 없고 해산하려는 여인의 구토속에 두려움이 한껏 더해진 것이다.
      이러한 고백이 내게는 오랜 가슴앓이를 고쳐줄 수 있는 명약일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한 또 하나의 화근이 될 수도 있는 이유는 충분하다. 남자는 남자의 생각이 있고 여자는 여자의 생각이 각각 있다. 나는 엄연히 한 아내의 남편이면서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가장이다. 그러나 마음에 숨기고 있는 것이 나의 솔직히 표현하고 싶어하는 자유와 더 이상은 아무것도 용납할 수 없는 아내의 정서에 큰 대결을 맞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마냥 묻어만 두지 못하는 글쟁이의 속성이 언젠가는 끌어내야만 풀리는 사정을 누가 알랴.
      이제는 나이 핑계하고 지난 옛 이야기이니 이해하라고 주문할지라도 남편의 사색까지도 독점하려는 아내의 권리와 아내된 여성의 속성을 어찌 달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글쟁이의 글을 쓰기 위한 소재라고 변명하지만 소재치고는 아내의 마음을 자극하는 소재를 끌어내어 집안에 불을 지를 필요까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는 내 며느리에게라도 나의 고상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만 싶은 심정이다. 내가 죽기 전에 반드시 내 가슴에서 끌어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의 표현에 자유를 누리고 싶어하는 내 생활에 큰 숙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나의 첫사랑이란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다. 내 마음 구석에 웅크리고 있어 지금도 그리움에 가슴을 조이곤 한다. 이런 사정을 아내가 알면 그는 분할 것이다. 몸뚱이끼리만 잠자리에서 함께 뒹굴고 마음은 어느 년이 차지하고 있다는 배신감 때문에 아마 그 충격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평생 한으로 삼아 버릴지도 모른다. 아마도 남편을 생각하는 정도를 지나쳐 동물로 여겨버릴 지도 모른다. 비록 옛 이야기라지만 과거를 알고 난 후부터는 남편의 불결함을 거부하고 남편의 위선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증오할 것이 뻔하다. 그렇지만 나의 첫사랑은 내게 있어서 중요한 경험이요 역사이다. 지울래야 지워지지도 않는 첫사랑의 눈동자가 순간 순간 뇌리를 감전하고 있으니 이것이 간음일까? 그러나 나는 단 한번도 음란한 마음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오직 그리움에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아내 앞에서도 그녀가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서산읍 장리라는 바닷가에 위치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내 나이 세 살 때에 경부선 철로가 지나가는 마을로 이사해 왔다. 뒷편에는 철도관사들이 줄을 지어 앉았고 거기에는 순전히 일본인들만 거주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마을 끝부분 신작로 갓집인데 나지막한 함석 양철지붕으로 된 세 집 중에 제일 끝집이었다.

      우리 집엔 칠남매가 있었는데 형은 일찍이 공무원이 되어 객지에 나가 있었고 위로 누이들 셋과 내 아래로 여동생이 있어서 모두 네 명의 여자들이 있었고 우리 집 바로 이웃에는 딸들만 여섯 명이었는데 우리네와 비슷한 동갑내기들로 줄줄이 친구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남자 친구란 하나도 없이 열명의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무려 팔년간을 지냈다. 그러므로 내 동갑내기가 되는 대연이란 계집아이는 눈만 뜨면 찾아왔고 나 역시 그러했다. 단순한 소꼽놀이지만 때로는 부부도 되고 때로는 선생님과 학생이 되기도 했다.

      대연이는 눈이 부엉이 눈처럼 크고 선명했다. 생일이 나보다 앞선 덕에 그애가 먼저 학교에 들어갔고 나는 다음 해에 입학했다. 그렇지만 그애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즉시 내게로 달려왔고 나도 또한 그리했다. 비록 소꼽친구로 시작한 친구 사이지만 학교에 간 동안도 보고 싶은 마음은 마침내 작게 느껴진 일이지만 그리움이란 게 분명했다. 6.25사변이 일어나 집은 모두 불타 없어졌고 그 애는 떠나버렸다. 나도 그곳을 떠났다. 그렇지만 마음은 결코 헤어지지 못하고 나는 밤마다 그애 꿈을 꾸었다. 꿈을 꾼 다음 날엔 어디 한적한 곳에라도 가서 울었다. "대연아 너는 지금 어디 있니?"

      다음 해에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 때에 나는 어디서 피난왔다는 여학생을 보았다. 마침 공학인지라 그 여학생은 한 반에서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 여학생의 눈이 마치 대연이의 눈을 빼다 박은 것처럼 꼭 닮았다. 갑자기 심장이 멎을 듯이 긴장이 되었다. 그 후로는 매일처럼 대연이를 보듯이 그 학생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말한마디도 못 건네봤지만 그 학생은 대연이의 대리역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큰 축복이었다. 소년의 불타오르는 그리움을 다소나마 달래줄 수 있었던 다행한 일이었다.

      어느덧 중학교를 마치고 그녀는 직장으로 나갔다. 이 헤어짐은 대연이에 대한 그리움을 그녀에게서나 찾으려 했던 사춘기 소년의 애절한 가슴을 몹시 태웠다. 내 나이가 들면서 대연이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다고 단 한 번이라도 손목을 잡아본 일도 없고 더더욱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던진 적도 없었다. 말하자면 나 혼자 그녀에 대해서 짝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직장앞을 서성대기도 하고 그러다가 마주치면 무안해서 피하곤 했다. 그리고 얼마후에 그녀는 서울로 직장을 옮겼다. 그 뒤로는 그녀마저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숨이 막힐 듯이 그리움이 차오면 눈이 절로 감긴다.

      어느새 청년이 되고 나는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은혜도 많이 받고 열심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이 항상 어른거린다. 어느새 나의 여성에 대한 미의 평가 기준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부흥사가 되고 교회를 담임한 목사로서 많은 군중들을 앞에 모셔놓고 설교한다. 그러면서 대연이의 눈동자를 두리번거리며 찾곤 한다. 그녀가 혹시 이 자리에 참석하고 있지나 않은가? 대연이에 대하여서는 아예 소식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대연이의 대리로 나타난 그녀는 나의 짝사랑이었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그리움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내게 새롭게 깨우쳐 주는 기회였다. 나는 본래 유행가를 배운 적도 부를 줄도 모른다. 그래서 음치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유행가 곡조를 타고 흘러나오는 애절한 그리움에 목이 메이는 소리는 나를 가끔 울리곤 했다. 이것이 영적으로 방해가 된다는 생각도 되고 아내에게 큰 잘못이라고 자책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아름다운 추억을 지울 수가 없어 가슴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내 앞에 단정히 차려 입은 중년 부인이 나타났다. 어디서 본 듯한 그 눈동자에 갑자기 나는 긴장이 되어 아무말도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기동이! 나야, 나, 대연이야."

      아! 이게 몇 년 만인가? 35년 만이 아닌가? 너무나 반갑고 떨렸지만 그 순간 나는 주저 앉을 뻔했다. 내 가슴에 묻고 그토록 찾고 찾은 소녀였기 때문이다. 나는 35년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은 까맣게 잊고서 오직 그때 소녀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차라리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름다운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내 평생 사모할 것을 지금도 마음에 그림자처럼 반짝이는 소녀 대연이의 눈동자가 사라지질 않는다.
    • 수필 - 시무언(視無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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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천 해수욕장에서 마주보이는 성주산은 마치 대천읍(당시)을 두른 병풍처럼 높고 청청하다. 집에서부터 칠십리길을 교인들과 함께 보행으로 이 곳에 닿았다. 저녁 늦게 도착한 곳은 성주산을 넘어 깊고 높은 골짜기에 임시로 천막을 치고 성주산 기도원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은 곳이다. 이 기도원에서 충서지방 감리교회 주최로 산상집회가 열렸다.
      여름만 되면 어디가 되든 산상집회에 모여드는 신도들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 일행도 칠십리를 마다하지 않고 온 것이다. 산상집회는 모처럼 집 밖으로 나들이 하는 시골 교인들에게는 마치 잔칫집에 가는 기분이어서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산상을 찾아가는 모양은 나름대로 천국에 올라가는 훈련이라도 하는 듯이 힘든 고개를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넘는다. 각처로부터 모여든 성도들의 찬송소리는 산을 울리고 첫날부터 하늘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같이 쏟아부음을 느끼는 듯 열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나는 평신도이지만 지난 주까지 열흘 간을 광시에 있는 초롱산에 가서 금식을 한 터여서 회복은 되었더라도 거듭되는 고행에 조금은 지쳐 있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어설프게 포장을 치고 그곳을 기도처로 잡고 이 시간 동안은 내가 꼭 무엇을 얻어야 된다는 쫓기는 마음이 들어 기도를 시작하면 전심 전력으로 목소리 내어 부르짖었다. 저녁에도 낮에도 같이 간 교인들과도 별 대화할 시간도 갖지 않고 진심으로 기도줄을 잡아당기듯 하였다.

      모습을 지켜보던 시골 감리교회 담임목사가 내게 접근하여 이 말 저 말을 물어 보고는 자기 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물론 나는 부흥사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니었다. 그런 내가 어찌 부흥회를 인도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분의 요청은 김선생님이 기도꾼이니 우리 교회에 와서 기도의 불을 붙이기만 하면 그게 부흥이지 별 것이 있느냐 하면서 꼭 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부흥회 인도하는 강사로 초빙된 것에 대하여 꿈을 꾸는 것 같아 그 뒤로 며칠밤을 설칠 만큼 걱정도 하면서 기도를 많이 했다. 그리고 약속된 날에 그 교회에서 설교단에 섰다. 강단 뒷벽에는 심령부흥회라는 오려 붙인 글씨 아래 기간과 함께 "강사 김기동 부흥사"라는 역사적인 계시가 붙어 있었다. 이때가 1962년 여름이었다.
      나는 설교에 대한 자신도 부족하고 경험도 전무한 부흥사 경력으로서 감당하기가 매우 두려웠지만 밤낮 없이 강단에 쭈그리고 엎드려 기도를 드림으로써 그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이 한 주간의 역사와 그 소문은 이웃 교회들로 퍼져나가 연달아 심령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을에 몇 군데 더 인도해 달라는 청원을 받아놓고 있었다. 이 때부터 우리 교회 안에서도 김 선생에서 김 강사로 불러주기 시작했다.

      내가 쉬는 주간에 이웃 교회에서 추계 심령부흥회가 개최되었다. 나도 은혜도 받고 기도도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시오 리쯤 되는 그곳에 교회 청년들과 함께 참석했다. 시골 예배당은 천장이 낮고 좁아서 한 백 명 쯤만 앉아도 더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설교자는 키도 크고 목소리는 옛날 부흥사들의 유행처럼 되어 버렸던 쉰소리로 무겁게 성경을 읽어 놓고는 설교가 시작된지 한 이십 분쯤 지날 무렵부터 이 사람 저 사람을 거론하며 인신 공격을 해대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지더니 마침내는 요즘 겨우 시작한 풋내기 부흥사가 건방지다는 말로 시작하더니 노골적으로 인신 공격을 퍼부어 댔다. 물론 나에게 대한 공격이라는 것 쯤은 나와 함께 참석한 교인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여 전도사와 몇몇 교인들은 능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끔 힐끗힐끗 곁눈질로 나를 훔쳐보는 이도 있고 강단 의자에 앉아있던 여 전도사는 나와 부흥목사의 뒷통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미안한 듯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어내곤 했다. 나는 무슨 큰 죄나 지은 것처럼 귓 바퀴가 화끈화끈 타오르고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처녀 부흥사가 당하는 당연한 과정일까? 그러나 이전엔 몰랐던 이러한 수모에 기가 막히고 움직일 힘마저도 빼앗겨 버릴 것 같았다.

      저녁 집회 시간은 끝났지만 모두가 가버린 빈 예배당에 홀로 남아 충격을 가라 앉히려는 노력의 기도만 연거푸 했지만 거의 번민으로 그 밤을 지냈다. 함께 동행했던 교회 청년들은 나를 기다리다 모두 가버린 뒤라서 새벽기도회까지 보고 그 예배당을 떠났다.

      아침부터 동쪽 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가리웠고 어쩌다 구름 틈새로 비집고 나온 햇살은 막 이삭을 내밀고 고개를 숙이려는 초가을의 들녘을 눈부시게 했다. 차라리 나도 번민이 없는 저 곡식들처럼 될 수는 없을까? 지나간 여름 장마에 움푹움푹 패인 시골 신작로를 걷자니 가출한 불량배들처럼 일어난 자갈들이 발 끝에 채이곤 했다. 그리고 삼각산처럼 뾰족이 솟아난 바위 끝이 미끈거리면서 몸을 한 쪽으로 몰아붙인다. 땅만 내려다 보며 걷는 발 사이로 마치 모래알들이 줄무늬를 하고 흐르는 듯해 보였다. 이제 십리는 걸어왔으나 아직도 오리는 더 가야 한다.
      그때 마침 발 부리에 걷어채인 돌 하나가 신작로가의 논으로 굴러 떨어지더니 벼 포기 사이로 숨어 버린다. 무심코 그 돌을 따라가던 시선이 멎고 번뜩 스쳐가는 기막힌 생각이 나를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아! 바로 저것이다. 나는 돌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물고 살자.' 그러자 걸음은 빨라졌다. 몇 십 발짝 앞에 신작로를 끊고 가로지른 개울이 보였다. 개울이라야 장마 때만 물이 흐르다가 그치는 시골풍경의 하나 쯤이다. 그러나 아직은 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어 손을 담그면 손목이 잠길 정도이다. 물 속에는 이빨을 드러내 놓기라도 한 것처럼 흰색 누런 색깔의 돌들이 돋보였다.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세히 들여다보니 옛날에는 이곳으로 큰 물길이 있었던 듯 싶다. 그러기에 수십리 물길 따라 떠내려 온 돌들처럼 둥글둥글한 돌들이 튀어난 것이 아닌가? 나는 물속에 손을 집어넣고 손에 만져지는 돌들을 몇 개 집어 올렸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를 냉큼 입 안에 넣었다. 조금은 크지만 그 중 하나는 입 안에 넣기에 적당했다. 허리를 일으키고 몇 발짝 뒤로 후퇴했다가 탄력을 이용해서 개울을 건너 뛰었다.
      이제부터는 내 이름을 시무언이라 하자. 볼 시(視)자와 없을 무(無)자와 말씀 언(言)자를 내 호로 삼자. 남들은 성경속의 베드로니 바울이니 다윗이니 하지만 나는 촌사람의 이름을 따서 발음하는 대로도 좋고, 시무언이란 내 인생 철학으로 삼자. 나는 남의 일을 보아도 도무지 말하지 않겠다는 덕으로 내 평생을 살자. 혹은 누가 나를 중상하고 욕할지라도 나는 시무언으로 사는 것이다. 나는 단에 서서 결코 남을 욕하지 않을 것이며 사석에서도 역시 그렇다.
      갑자기 어젯밤에 짓눌렸던 어깨가 가벼워진 듯했다. 아까까지 검게 덮여만 있던 우리 마을 구름 사이로 비집고 나온 햇살이 강하게 내려 쪼인다.